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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群山)의 근대문화 탐방 1] 시간의 궤적을 걷다

  • 이미선 기자
  • 입력 2026.02.14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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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멈춰버린 시간의 조각, 적산가옥의 그림자 아래 서다

서해의 바람이 싣고 온 짠내가 낮은 지붕 사이를 훑고 지나간다. 

전라북도 군산, 이곳은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 도시다. 

2026년의 최첨단 기술이 흐르는 거리 바로 옆에는 

1930년대의 적막이 박제된 채 놓여 있다. 


우리는 이를 근대라 부르고 누군가는 아픔이라 읽으며, 

여행자들은 낭만이라 소비한다. 

그 묘한 경계 위에 서서 군산의 첫 번째 조각을 집어 들었다.


 

군산1군산세관의 옛모습.JPG
▲ 군산세관의 옛모습. [사진=EET NEWS]

  

수탈의 관문, 거대한 미곡 창고가 된 도시


군산의 근대는 자생적인 발아가 아니었다. 1899년 개항 이후 이곳은 철저하게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거점으로 기획되었다. 당시 군산항에는 쌀을 쌓아둔 산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풍요는 우리 민족의 것이 아니었다.  


군산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채만식이 떠오른다. 특히나 그의 대표작 〈탁류〉가 생각난다. 군산은 단순한 항구가 아니라 ‘수탈의 시스템이 완성된 공간’으로 묘사된다.


“호남평야의 쌀은 군산으로 모여들고, 군산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간다.


쌀은 넘쳤지만 조선인의 식탁은 비어 있었다.

도시는 성장했지만 사람은 쇠락했다.”


이 흐름 속에서 조선인 농민은 땅을 잃고 중간 상인은 몰락하며, 도시는 겉으로만 번듯해진다. 일본 상인과 금융 자본은 창고와 은행을 세우고, 조선인은 그 아래에서 빚을 진 채 하루를 버틴다. 채만식은 이를 통해 식민지 경제의 구조를 풍자적으로 폭로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군산 원도심의 정돈된 격자형 도로는 당시 외지인 거주 구역을 중심으로 설계된 ‘수탈의 설계도’다. 화려한 조명이 걸린 은행과 붉은 벽돌의 세관 건물들은 그 설계도 위에서 가장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 

구 군산세관 본관 건물 앞에 서면 벨기에에서 수입한 붉은 벽돌과 서구식 건축 양식이 묘한 이질감을 자아낸다. 당시 한국에 도입된 서구식 건축물 중에서도 보존 상태가 양호한 축에 속하는 이 건물은, 아이러니하게도 효율적인 자원 이동을 위한 감시의 현장이었다.

 

군산2수탈의 현장, 뜬다리.jpg
▲ 수탈의 현장, 뜬다리. [사진=EET NEWS]

 

수탈의 시계를 조절하다, 뜬다리 부두의 기묘한 움직임


군산 내항의 갯벌 위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철골 구조물, 부잔교는 군산이 왜 수탈의 전초기지였는지를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서늘하게 증명한다. 서해안 특유의 거대한 조수간만의 차는 대형 선박이 항구에 접안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일제는 이 자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물의 흐름에 따라 상하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뜬다리 부두를 설계했다.


밀물이 들어오면 다리가 떠오르고 썰물이 되면 가라앉는 이 유기적인 구조물 덕분에, 군산항은 24시간 멈추지 않는 수탈의 공장이 되었다. 이곳을 통해 호남평야의 쌀들이 거대한 증기선의 배를 채웠고, 일본의 병참 기지로 끊임없이 실려 나갔다. 당시 군산항에는 하루 평균 수만 가마의 쌀이 적재되었는데, 뜬다리는 그 거대한 물량을 소화해내던 일종의 빨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녹이 슨 채 바닷바람을 견디고 있는 부잔교는 더 이상 쌀을 실어 나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삐걱거리는 철제의 마찰음 속에는 당시 쌀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위태로운 다리 위를 오갔을 조선 노동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박제되어 있다. 육지의 적산가옥이 지배층의 탐욕을 보여준다면, 바다의 뜬다리는 피지배층의 고단한 노동과 빼앗긴 풍요를 상징하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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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동 히라쓰 적산가옥. [사진=EET NEWS]

 

신흥동의 붉은 담벼락, 적산이라는 이름의 낙인


내항을 뒤로하고 언덕길을 오르면 신흥동 일대의 적산가옥 단지가 나타난다. ‘적산(敵産)’, 즉 적의 재산이라는 이 서늘한 단어는 해방 후 주인을 잃고 남겨진 이들의 집을 뜻한다. 그중에서도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당시 군산에서 부를 축적했던 일본인 상류층의 권력을 상징하듯 위압적으로 서 있다. 그 아래로는 여전히 서늘하고 슬픈 기색이 흐른다. 


‘ㄱ’자 모양으로 꺾인 목조 가옥의 긴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발밑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나무 마룻바닥이 내는 기분 나쁘지 않은 삐걱거림이다. 2층 다다미방에서 창밖 정원을 내려다보면, 잘 가꾸어진 석등과 연못이 평화로운 정경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 평화는 대척점에 서 있던 조선 소작농들의 고혈 위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이 가옥은 단순한 건축 유산을 넘어, 공간이 어떻게 지배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군산4에도시대 건축양식을 간직한 국내 유일의 읿본식 사찰, 동국사.jpg
▲ 에도시대 건축양식을 간직한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 [사진=EET NEWS]

 

동국사(東國寺), 유일하게 남은 일본식 사찰의 참회


군산 근대사의 정점은 동국사에서 완성된다. 1909년 일본 승려 우치다 젠조에 의해 금강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이곳은 ‘에도 시대의 건축 양식을 간직한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이다. 우리 전통 사찰의 부드러운 곡선미나 화려한 단청 대신, 75도에 달하는 급경사의 높은 지붕과 단조로운 직선의 목조 건물이 시야를 압도한다.


동국사의 본질은 단순한 종교 시설을 넘어선다. 당시 일본 불교는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서 조선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천황에게 충성하게 만드는 이른바 황민화 교육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사찰 대웅전과 복도로 연결된 요사채의 구조’는 일본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며, 이는 ‘공간이 어떻게 인간의 의식을 통제하고 규격화하는지를 증명하는 건축적 장치’다.

대웅전 뒤편의 울창한 맹종죽 숲은 일본에서 직접 가져와 심은 것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그러나 이 소리는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던 시대의 신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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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조성한 소녀상 뒤로 조동종 스님들 전쟁 참사문 비석. [사진=EET NEWS]

 

주목할 점은 ‘1992년 일본 조동종 승려들이 과거의 만행을 공식적으로 사죄하며 세운 참사문 비석’이다. 포교라는 명목하에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문화유산을 파괴했다는 자성의 기록은, 이 공간을 치욕의 유산에서 화해와 증언의 광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우리는 포교라는 명목하에...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문화유산을 파괴했다. 진심으로 참회하며 사죄한다."


대웅전 앞마당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식 건물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현재의 풍경은, 군산이 역사를 기억하고 극복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왜 우리는 이 아픈 기억을 보존하는가


누군가는 묻는다. 왜 일제의 잔재를 허물지 않고 보존하느냐고. 하지만 군산의 적산가옥들은 네거티브 헤리티지, 즉 ‘부정적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치욕스럽고 아픈 역사라 해서 지워버린다면, 우리는 그 역사를 극복할 기회조차 잃게 된다.


2026년의 군산은 더 이상 수탈의 항구가 아니다. 낡은 창고는 카페와 갤러리가 되었고, 거주지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 본질적인 그림자까지 지워진 것은 아니다. 

군산의 골목길을 걷는다는 것은 화려한 조명 뒤에 가려진 시대의 그늘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현재의 좌표를 확인하는 일이다. 군산의 시간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 미래를 비추고 있다. 이 도시가 주는 울림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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