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원·용혜인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청문 정국이 남긴 질문
- 정책 경쟁 넘어 상대를 부정하는 정치, 갈등은 어디까지 계속돼야 하나
같은 사건을 보고 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한쪽에서는 명백한 의혹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정치적 공격이라고 한다. 한쪽에서는 공직 후보자의 도덕성과 자질을 검증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표적 수사와 정치 공세의 연장선이라고 맞선다.
최근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청문 정국은 우리 정치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나뉘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용 후보자는 인사청문회를 앞둔 지난 13일 후보직에서 자진 사퇴했고, 김 후보자는 15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친 뒤 19일 역시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따라서 두 사람을 둘러싼 논란의 사실관계와 정치적 책임은 각각 구분해서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두 사람 개인의 적격성만은 아니다. 하나의 의혹과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선이 진영에 따라 얼마나 극명하게 갈라지는가 하는 점이다.
김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을 놓고 야권은 철저한 검증을 요구했고, 여권에서는 의혹 제기 과정과 수사정보의 취득·공개 경위를 문제 삼았다. 김 후보자 청문회에서는 야당이 신청한 증인들이 채택되지 않았고, 청문회장 안에서는 김 후보자의 의혹뿐 아니라 한동훈 무소속 의원이 공개한 자료의 출처와 적법성을 둘러싼 공방까지 벌어졌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더 등장한다.
한동훈 의원은 청문위원도, 증인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증인으로 불러달라고 요구했지만 실제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았고, 청문회 밖에서 SNS와 기자회견 등을 통해 김 후보자를 향한 공세를 이어갔다. 언론에서도 이를 ‘장외 검증’, ‘장외전’으로 표현했다.
물론 국회의원이 국회 밖에서 자신의 주장을 밝히는 것은 정치 활동의 일부다. 후보자에 대한 의혹 제기 역시 공직 후보자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필요할 수 있다. 반대로 그 의혹 제기에 사용된 정보의 취득과 공개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를 따지는 것 역시 필요한 검증이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이다. 우리는 의혹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누가 의혹을 제기했는가’를 놓고 싸우고 있는 것인가.
정치가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상대 진영을 공격하고 방어하기 위한 전쟁으로 변하면, 사건의 실체는 점점 뒤로 밀려난다. 국민 역시 사실을 보고 판단하기보다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이 제공하는 해석을 먼저 받아들이게 될 위험이 커진다.
이러한 장면은 처음이 아니다. 2019년 조국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논란은 한국 사회를 사실상 두 진영으로 갈라놓았다.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이끄는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한쪽에서는 ‘조국 사퇴’를, 다른 한쪽에서는 ‘조국 수호’와 검찰개혁을 외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이후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사이에서는 인사, 수사지휘권, 징계 등을 둘러싼 충돌이 계속됐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은 제도와 권한을 둘러싼 논쟁을 넘어 정치적 진영 대결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사건 하나하나의 사실관계보다 ‘추미애냐 윤석열이냐’, ‘검찰개혁이냐 검찰 장악이냐’라는 선택을 요구받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비슷한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등장인물과 여야의 위치는 바뀌었지만 정치의 작동 방식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한국 정치의 양극화가 단순한 인상만은 아니라는 연구도 있다. 한국 국회의 정치 언어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정치 엘리트 간 양극화가 2016년 후반 이후 크게 높아졌으며, 정당 간 대화와 타협의 공간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특히 정치권이 사회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증폭시킬 가능성을 지적했다.
물론 정치적 대립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여당과 야당이 같은 생각을 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세금과 복지, 노동과 기업, 외교와 안보, 기후와 에너지, 교육과 주거를 놓고 서로 다른 철학과 정책을 제시하고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좋은 정치적 갈등은 더 나은 해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다. 정책을 놓고 싸우고, 논리와 자료를 가지고 상대를 설득하고, 국민의 평가를 받는 것이 정당정치이다. 서로 다른 생각이 충돌하면서 더 나은 정책을 만들어내는 것이 민주주의가 갈등을 제도 안에 허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다른 민주국가에도 정치적 양극화와 진영 갈등은 존재한다. 특히 미국의 정치 양극화 역시 심각한 수준이라는 연구가 축적돼 있어 한국만 유독 극단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도 상대 정당과 지지자에 대한 감정적 거리, 이른바 ‘정서적 양극화’가 중요한 정치 문제로 연구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가’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정치적 대립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이다.
정당의 경쟁이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둘러싼 경쟁이 아니라 상대 진영을 무너뜨리는 경쟁이 되고, 정책보다 사람을 공격하고, 상대의 주장은 내용보다 어느 진영에서 나왔느냐에 따라 판단된다면 민주주의가 감당해야 할 비용은 커진다.
더 우려되는 것은 정치권의 갈등이 정치권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지지자에게 전달되고, 다시 온라인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증폭된다. 어느 순간 상대 정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대화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고,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의 상식과 도덕성까지 의심한다.
정치의 양극화가 국민의 양극화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번 청문 정국을 보며 그래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의혹이 있다면 진영에 관계없이 같은 기준으로 검증하고 있는가.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의 문제에는 관대하고 상대 진영의 같은 문제에는 엄격한 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국회라는 제도적 공간보다 SNS와 유튜브, 장외 여론전이 더 강력한 정치 무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우리 정치의 목적은 상대를 이기는 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인가.
양당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필요하다. 그러나 그 경쟁의 결과가 더 나은 정책과 제도가 아니라 국민의 분열이고,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이며, 국가적 의사결정의 마비라면 우리는 지금의 정치 구조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정치에서 갈등을 없앨 수는 없다. 없애서도 안 된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 갈등의 최종 목적은 상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해와 가치 사이에서 사회가 함께 살아갈 해법을 찾는 데 있어야 한다.
조국 사태에서도,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충돌에서도, 그리고 지금의 인사청문 정국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다.
정권은 바뀌고 여야도 바뀐다. 공격하는 사람과 방어하는 사람의 자리도 바뀐다. 그런데 상대를 바라보는 방식만큼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오늘 내가 상대에게 적용한 정치의 기준은 언젠가 내가 그 자리에 섰을 때 나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이제는 진영을 떠나 물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하나의 사건을 두 개의 진실로 바라보며, ‘두 개의 대한민국’으로 살아갈 것인가.
정치가 국민의 갈등을 이용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국민을 다시 연결하는 일을 시작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