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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지층: 단종의 길을 걷다1]조선의 가장 아픈 손가락, 단종

  • 윤재훈 기자
  • 입력 2026.03.0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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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때로 승자의 붓 끝에서 일그러지지만, 민초들의 기억과 그들이 밟고 간 땅의 이름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단종과 정순왕후, 그리고 그들을 지켰던 이름 없는 이들의 흔적을 따라 본 시리즈를 시작한다.
 
3,1대혁명1정업원,비각 현판에 쓰인 영조의 친필인, 전봉후암 어천만년前峯後巖 於千萬年”앞 산의 봉우리와 뒤 언덕 바위여! 천만 년이나 영원하리라 뜻으로 정순왕후의 한 많은 삶을 위로하는 영조의 친필..JPG
▲ 비각 현판에 쓰인 영조의 친필, 전봉후암 어천만년前峯後巖 於千萬年, ”앞 산의 봉우리와 뒤 언덕 바위여! 천만 년이나 영원하여라" 뜻으로 정순왕후의 한 많은 삶을 위로하고 있다.  [사진=EET NEWS]


1457년 음력 6월, 한양은 비에 젖은 울음빛이었다.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등된 열일곱의 소년은 정든 궁궐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그것은 유배라는 이름의 사형 선고였고, 한 시대의 심장이 멈추는 소리와도 같았다.


정업원과 영도교(永渡橋), 돌아올 수 없는 다리


열다섯의 정순왕후 송씨는 남편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녀는 홀로 위리안치된 도성 안, 정업원(淨業院)에 남게 되었다. 그곳은 본래 수행 공간이었으나, 그날 이후 '왕비의 눈물'이 서린 감옥이 되었다.

요즘 봄날을 맞아 많은 사람이 오늘도 청계천을 나간다. 머지 않아 꽃망울이 달리기 시작하면 더욱 많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무심히 한 다리를 건널 것이다. 여느 다리나 별 다름이 없는 ‘종로구 숭인동과 중구 황학동을 잇는 청계천 하류 부근’의 콘크리트 다리.  

이곳으로 단종의 행렬은 도성을 벗어났다. 사람들은 '영영 이별하는 다리'라 하여 영리교(永離橋)라고도 불렀다. 돌로 놓인 다리는 견고했으나, 수백 년 그 위를 걷는 민초들의 마음은 서러웠을 것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 왕방연이 단종을 호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읊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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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망정, 이곳에 올라서면 빌딩이 없던 옛날에는 멀리 청계천의 영리교와 발밑 여인시장까지 다 보여겠다. [사진=EET NEWS]

 

동망봉의 바람과 자지동천의 자주색 눈물


단종이 떠난 뒤, 정순왕후의 삶은 지독한 가난과 그리움의 연속이었다. 세조는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은 엄벌을 내릴 것이라고 엄명을 내렸으나, 민심의 근심은 권력보다 깊었다.


여인 시장과 자주동천

 

끼니마저 어렵게 되자 정순왕후는 인근의 자주동천(紫芝洞泉)에서 옷감을 자주색으로 물들여 팔아야만 했다. 그 자리는 조선 초기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던 유관이 살았는데 그는 지붕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면서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라 농담을 하였다는, ‘유재상의 우산’이라는 고사가 생긴 곳이다. 그 후 이곳은 외손인 이수광 집안으로 상속되었는데  그 집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이수광이 집을 새로 짓고 그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집 옆에 ‘동원비우당기’ 비석이  서 있다. 

그후 자주동천은 1614년 그의 손자 이수광이 기거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인『지봉유설』편찬한 비우당의 뒤뜰이 되었다. 

 

인근의 마을 여인들은 정순왕후를 걱정해 언덕 아래 동묘 근처에 '여인시장'을 열고, 몰래 먹을 것을 그녀의 집 앞에 두고 가곤 했다. 지금도 관우의 초상이 걸린 동관왕묘 옆 동묘 풍물시장의 혼란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보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권력이 칼을 높이 들 때에도 민초들은 쌀 한 줌의 자애로 그녀를 돌봤던 것이다. 

 

그녀는 매일 아침 단종과 마지막 밤을 보냈던 청룡사 우화루를 지나, 멀지 않은 동망봉(東望峰)에 올랐다. 이름 그대로 동쪽, 즉 남편이 유배 간 영월을 바라보며 안위를 빌었던 봉우리이다. 

지금은 운동시설이 들어서고 마을 사람들의 기합 소리까지 들리는 평범한 공원이 되었지만, 바람이 부는 날이면 여전히 그날의 말발굽 소리와 왕후의 흐느낌이 들리는 듯하다. 저 아래 시커먼 절벽으로 돌개바람이라도 이는 듯 한데, 일제 강점기 왜놈들이 돌을 캐기 위한 채석장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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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에서 바라본, 굽이쳐 흐르는 서강. [사진=EET NEWS]

 


영월 청령포, 피울음 섞인 자규(子規)의 노래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이고 뒤편은 육육봉의 험준한 절벽이 솟아있는, 이곳은 천혜의 감옥이었다. 소년 임금은 그곳에서 홀로 하늘을 보며 스스로를 '죄인'이라 부르며 세상을 견뎠다.

그리고 1457년 10월, 마침내 사약이 내려진다. 사육신도 생육신도, 심지어 세조의 친동생인 금성대군까지도 단종 복위를 꿈꾸었으나 실패로 돌아가 능지처참을 당하거나 사약을 받았다. 단종 역시 열일곱, 꽃조차 다 피우지 못한 나이였다. 단종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처지를 두견새(자규)에 의탁해 시를 남긴다.


일지단추(一枝團秋) 외로운 몸 산속을 떠도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울음소리 끊어진 새벽 

산마루에 달빛 걸려 있고

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두견화만 붉구나

— 단종, 「자규시(子規詩)」 중에서


단종의 시신은 강물에 버려졌으나, 영월의 아전 엄홍도는 목숨을 걸고 시신을 수습했다.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던 그의 기개가 오늘날 우리가 참배하는 장릉(莊陵)을 만들었다.

 

 

3,1대혁명4▲ 원각사지 10층석탑. [사진=EET NEWS].jpg
▲ 원각사지 10층석탑. [사진=EET NEWS].

 

원각사의 탑, 승자의 공간에 새겨진 패자(敗者)의 기도


단종 사후 세조는 온 몸에 부스럼이 그치지 않아 명산 대찰을 떠돌면 치료에 힘썼다. 


민간에 구전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세조가 월정사로 치료차 가는 길에 계곡에서 목욕을 하였다. 그때 등이 간지러워 누구에게 부탁할까 돌아보는데 마침 한 동자가 있어 등 좀 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세조는 동자에게 나를 봤다고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자, 동자도 왕이 어디가서 문수보살 보았다고 절대 말하지 말하고 했다. 소년은 사라지고 왕은 그때서야 '아, 내가 문수보살을 보았구나'하고 깨달았으며, 부스럼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그 후 8년, 세조는 도성 한복판에 거대한 사찰 원각사(圓覺寺) 짓는다. 오늘날 탑골공원의 전신이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불교에 귀의해 세운 이 공간은, 지독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3,1대혁명5▲ 1902년 건축가 심의섭이 서울에 만든 최초의 근대식 공원,  3,1절에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사진=EET NEWS].jpg
▲ 1902년 건축가 심의섭이 서울에 만든 최초의 근대식 공원, 3,1절에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사진=EET NEWS]

 

말이 없는 돌의 증언


원각사의 전각에서 수많은 사람이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지금도 그 마당에 십층석탑은 비록 유리문 안에 갇혀 있지만, 의연하게 서 있다. 


"역사는 승자의 붓으로 기록되지만, 

  기도는 패자의 언어로 이어진다."


흥미롭게도 이 '왕권의 상징'이었던 자리는 수백 년 뒤인 1919년 3월 1일, 민중들이 모여 독립을 외치는 민권의 광장으로 탈바꿈한다. 권력이 세운 탑이 민초들의 외침을 지켜보는 증언자가 된 것이다.

 

에필로그: 하늘은 들었는가


하늘은 그날 소년 임금의 눈물을 들었을까?

역사는 참으로 묘하기만 하다. 단종은 패배한 왕으로 기록되었으나 사람들의 가슴속에 가장 오래 살아남은 임금이 되었고, 정순왕후는 82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남편의 왕위가 회복되는 길을 닦았다. 특히 숙종은 왕권 강화와 왕실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사육신을 현창하고 단종을 복위시켰다. 노산군을 단종으로 추존하고 묘호를 올리고, 노산군 송씨를 '정순왕후'로 복귀시키고 사당을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여기에 영조는 정업원 비각 현판에 "전봉후암 어천만년前峯後巖 於千萬年, 앞 산의 봉우리와 뒤 언덕 바위여! 천만 년이나 영원하여라"라는 글을 친히 써서 한많은 정순왕후의 삶을 위로하고 있다. 우리가 걷는 종로의 보도블록 아래나, 영도교의 차가운 돌덩이 아래에는 이처럼 켜켜이 쌓인 지층이 있다. 억울한 죽음과 숭고한 의리,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도착한 뒤늦은 정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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