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총으로 말하지만, 시는 다시 인간이란 이름을 부른다“
'시와 전쟁'을 특집으로 다룬 계간 『푸른사상』 2026년 여름호(통권 56호)가 출간됐다.
이번 호는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시가 수행해야 할 윤리와 증언의 역할을 다각도로 조명하며, 문학이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가장 깊은 언어임을 보여준다.
이번 호에는 강경아, 고인환, 김수우, 김청우, 김흥기, 문경수, 박관서, 박이정, 유종, 이동순, 이영숙, 하상일, 허유미, 고명철 등의 시인과 평론가가 참여해 '시와 전쟁'을 주제로 다양한 시각을 펼쳤다.
고명철 평론가는 총론 「반전·평화를 위한 시의 도덕적 투쟁」에서 "전쟁에 맞서는 시인의 위대한 도덕적 투쟁"을 강조하며, 시가 단순한 감상의 장르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윤리적 실천임을 제시한다.
강경아 시인은 "세계 평화의 진정한 안전지대는 문학"이라고 말하며 문학적 연대의 가능성을 제안했고, 고인환 평론가는 시인의 목소리가 "군인의 귀를 무너뜨리는 언어"라고 해석했다.
김수우 시인은 "시는 생명의 무기"라고 규정했고, 박관서 평론가는 "시는 숫자를 이름으로 되돌리고, 통계를 얼굴로 복원한다"며 전쟁이 지워버린 인간성을 시가 다시 회복시키는 힘을 강조했다.
박이정 시인은 더욱 분명한 목소리를 낸다. 그는 "시인은 평화를 바라는 세계시민과 따뜻한 심장을 나누며 살려고 시를 쓴다"며,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전쟁을 향해 "총으로 말하는 대화를 비판하는 시가 세계 전쟁의 토양 위 여기저기서 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전쟁이 증오를 확산시키는 동안, 시는 인간의 양심과 평화를 향한 연대를 끊임없이 복원하는 언어라는 것이다.
문경수 시인은 "도대체 이 전쟁통에 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절박한 질문을 던지며 시인의 무력감과 책임을 동시에 응시한다. 허유미 평론가는 "시는 전쟁을 멈추게 하지는 못하지만, 파괴된 언어의 파편을 다시 말이 되게 한다"고 말하며 시의 존재 이유를 되새긴다.
이영숙 평론가는 전쟁문학에서 시와 소설의 차이를 인상적으로 설명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소설이 '전쟁터라는 하나의 세계'를 재현(Representation)하는 서사적 언어라면, 시는 훼손된 육체와 처참한 현장을 독자 앞에 그대로 제시(Presentation)하는 언어다. 그는 "소설은 설명과 인과로 빚은 서사적 언어이고, 시는 증언과 비명으로 빚은 육체적 언어에 가깝다"고 말한다. 전장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소설이라면, 전장을 온몸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시라는 해석이다.
이번 특집은 전쟁을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시험하는 윤리적 현실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준다.
신작 시 코너에는 김수, 김종숙, 문태준, 박한, 수완, 안준철, 여국현, 유희주, 윤석정, 이상국, 조이경, 천양희 시인의 작품이 수록됐으며, 박소명의 동시, 김영란의 시조, 조미희의 산문도 함께 실렸다.
기획 연재 '시 70년 오디세이'에서는 김준태 시인이 베트남 시인 반레(Văn Lê)의 문학세계를 조명했다. 특히 다음 대목은 이번 호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 장면으로 읽힌다.
"월맹군 정규군이었던 시인 반레! 한국 청룡부대 병사였던 시인 김준태.
1960년대 그 시절 나와 총칼을 마주 겨눈 반레는 한국의 먼 하늘을 바라본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다.
그가 잠시 멀리 두고 온 베트남의 하늘이 마치 한국의 하늘과 겹쳐지는 느낌이다.“
적으로 총을 겨누었던 두 사람이 반세기가 흐른 뒤 시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이 장면은, 문학이 국경과 이념, 전쟁의 상처를 넘어 인간과 인간을 다시 만나게 하는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젊은 평론가가 읽는 오늘의 시'에서는 양순모 평론가가 조혜은·장석원 시인의 작품을 통해 오늘의 시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의미를 성찰했다. 그는 "오늘의 시는 부모 된 자들의 시여야 한다"며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책임을 감당하는 인간의 윤리를 이야기한다.
'김남주 읽기'에서는 김남주 시인의 동생 김덕종과 맹문재 시인의 대담이 실렸으며, 『김남주 산문 전집』에 수록되지 않았던 김남주 시인의 해설 원고도 새롭게 발굴해 공개했다.
한편, 제56회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는 문현 시인이 당선됐다. 심사를 맡은 공광규, 맹문재 시인은 현실 인식과 서정성을 함께 갖춘 상상력을 높이 평가했다.
전쟁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인간의 언어를 파괴한다. 그러나 이번 『푸른사상』 여름호는 그 폐허 위에서도 끝내 살아남는 것이 시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총성이 멈춘 뒤에도 인간의 양심을 오래도록 깨우는 언어, 그것이 시이며 문학이라는 점을 이번 특집은 깊고 묵직하게 증명하고 있다.
BEST 뉴스
-
제36차 성지순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및 한국 천주교 절두산 순교성지를 찾아서
▲ 양화진 역사공원의 모습. photo by AI 서울의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왕조의 역사와 근대화의 흔적, 독립운동의 기억, 종교적 신념과 희생의 역사가 한 공간 안에서 서로 만나기도 한다. 오는 9월 13일 일요일 오후 2시, 합정역 8... -
[연재를 시작하며] 바다를 지키던 눈으로, 국토의 물길과 옛길을 걷다
“바다를 지켜야만 강토가 있고, 강토를 지켜야만 조국이 있다.” 해군가에 흐르는 이 한 구절을 가슴에 품고 36년 동안 바다에서 대한민국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무거운 제복과 군모 대신 가벼운 옷을 입고, 거친 군함 대신 대중교통과 두 발에 의지해 제가 목숨 바쳐 지켜온 조국의 땅과 물길을 ... -
치과의사가 만든 AI 콘텐츠 100만 뷰…치아모아 미디어랩, 콘텐츠 사업 확대
▲ 치아모아 미디어랩이 제작한 실사형 AI 콘텐츠 ‘불량치과(歯科上等)’. 의료인 공감형 콘텐츠와 패러디, 자체 캐릭터 기반 영상 등 다양한 포맷을 선보이고 있으며, 일부 콘텐츠는 인스타그램에서 1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사진=치아모아 미디어랩] 치과의사가 직접 ... -
시립금천청소년센터, 여름방학 문화예술탐험으로 청소년 창의성과 감수성 키워
▲시립금천청소년센터는 서울특별시 여름방학 청소년 동행캠프의 일환으로 지난 7월 27일부터 8월 7일까지 2주간 ‘문화예술탐험대: 아트(Art Traveler)’를 운영했다. [사진=시립금천청소년센터] 청소년들이 미술관과 자연, 디지털 기술, 창작활동을 직접 경험하며 문화예술에 대한 ... -
모두투어, 중국 샤먼 테마여행 기획전 출시…도시·문화·미식·휴양 한 번에
▲ 중국 남동부의 해안도시 샤먼(하문) [사진=모두투어] 중국 여행의 관심 지역이 유명 관광지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관광에서 도시의 역사와 건축, 문화유산, 미식과 휴양을 함께 경험하는 형태로 확대되는 가운데 모두투어가 중국 남동부의 해안도시 샤먼(하문)을 새로운 테마 ... -
히말라야를 물들인 푸른 꽃…신비로운 색감의 ‘블루포피’
▲ 푸른빛의 꽃잎에 노란 수술이 어우러진 블루포피(Blue poppy) 모습. [사진=Nature Pathway X] 깊고 선명한 푸른빛의 꽃잎에 노란 수술이 어우러진 블루포피(Blue poppy)가 눈길을 끈다. 흔히 히말라야의 고산지대에서 만날 수 있는 꽃으로 알려진 이 식물은 독특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