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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제독의 국토기행 3] 임진왜란 마지막 격전지, 신성리 순천 왜성에서, 순천함과 신성함을 생각하다.

  • 윤재훈 기자
  • 입력 2026.10.27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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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왜성.jpg
▲ 순천왜성 [사진=이병록]

 

조곡동 안에 순천역과 동순천역이라는 두 개의 기차역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고, 두 역은 불과 1.7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해룡면에도 평화역과 성산역이 있고, 별량면에도 원창역과 구룡역이 있었다는 답이 올라왔다. 면적이 넓은 군과 면에는 역이 둘 이상 있는 곳이 있을 수 있다. 순천역과 동순천역은 과거 지리 시험 문제로 출제되었다는 말을 내가 기억하고 있었다. 

 

이 글은 순천 지역명을 이름에 단 함정이 해군에 두 척이나 있었다는 순천왜성(신성리) 전투와 순천함, 그리고 신성함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구축함이나 초계함에 도시 이름을 붙였다. 군함의 수가 전국 행정구역보다 적었기 때문에 모든 지역의 이름을 함정에 붙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순천은 ‘순천함’과 ‘신성함’, 두 개의 군함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신성함은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의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다.

 

해군 창설 초기에도 PCE급 초계함에 신성함(PCE-1001)과 순천함(PCE-1002)이 함께 존재했다. 이후 한동안 신성함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으나, 어느 해 해군참모총장이 군함 명명에서 역사성과 전통을 강조하며 신성함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그리고 PCC급 초계함에 다시 ‘신성함(PCC-783)’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고, ‘순천함(PCC-767)’ 역시 함께 바다를 누볐다. 순천이라는 한 지역의 지명과 해안 마을 이름이 두 척의 군함에 사용된 것은, 정유재란 당시 전라좌수영의 핵심 고을이자 최후 결전지였던 순천의 위상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흔적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 이유가 신성포에서 거북선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천왜성이 있는 신성리 마을을 찾아가 주민들에게 물어보아도 거북선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거북선을 건조한 곳으로는 흔히 세 곳의 선소가 거론된다. 전라좌수영 본영 선소, 돌산 선소, 그리고 순천 선소다. 여기서 순천 선소는 조선시대 행정구역상 순천부에 속했던 현재 여수시 시전동의 선소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신성’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답을 찾으려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신성리에서 벌어진 격전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군에 의해 순천 지역은 혹독한 유린을 당했다. 왜군은 임진왜란 패배의 원인이 전라도 수군과 의병들의 강력한 저항, 그리고 전라좌수영의 배후 거점이었던 순천도호부에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전라도를 철저히 공략하는 것이 정유재란의 핵심 목표였다.

 

당시 왜군은 초반에 북진을 시도했으나, 육지에서는 직산 소사 전투에서 막히고 해상에서는 명량해전에서 대패하면서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이에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해안 곳곳에 왜성을 쌓고 장기 항전에 대비했다.

 

순천왜성2.jpg
▲ 순천왜성 [사진=이병록]

 

신성리에 있는 순천왜성(왜교성)은 왜군 주력 장수인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호남 공략 및 남해안 방어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축성한 성곽이다. 육지와 바다를 동시에 방어할 수 있도록 설계된 요새로, 직접 다녀본 여러 왜성 가운데서도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났다. 남해안 길목을 따라 구축된 주요 왜성은 보통 28개 안팎으로 분류하며, 지성과 임시 진지까지 포함하면 30~32개 이상으로 본다.

 

대표적인 왜성으로는 남해, 사천 선진리, 고성, 거제 장문포, 창원 웅천과 안골포, 부산진 자성대, 구포, 기장 죽성리, 김해 죽도, 울산, 서생포, 양산 증산왜성 등이 꼽힌다.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온 《간양록》의 저자 강항(姜沆) 선생 역시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축조한 순천왜성에 대해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왜군이 순천왜성을 중심으로 호남으로 진출하려 하거나 배후를 위협하려는 동향, 진을 치고 있는 적의 병력 규모 등을 조정에 상세히 전달했다.

 

기록에 따르면 순천왜성은 1597년 9월 중순에 착공하여 불과 3개월 남짓 만에 완성되었다. 전역 후 순천의 친구 김태곤이 순천왜성에 관해 연구해 보라고 권했을 때는 향토사학자의 몫이라 여겼으나, 다시 확인해 보니 지난 10여 년 동안 학계와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연구 성과가 쌓여 있었다.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이듬해 7월 16일 조·명 연합 수군이 결성된 뒤, 7월 19일 절이도 해전이 벌어진다. 완도와 순천 중간에 있는 고흥 절이도(거금도)에서 왜선 100여 척 중 50여 척을 파괴 및 격퇴하여 남해 서부의 제해권을 장악한다. 조·명 연합 수군은 완도 고금도에서 동진하여, 순천왜성에 고립되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순천 앞바다가 왜군과의 격전지가 된 것이다.

 

1598년 9월 20일부터 10월 4일까지 6차례에 걸쳐 펼쳐진 순천왜성 전투(왜교성 전투)는 정유재란 최대의 육·해상 합동 결전이었다.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 수군, 권율이 이끄는 조선 육군과 유정이 이끄는 명나라 육군이 합세하여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을 압박했다. 10월 3일 제5차 전투에서는 명나라 전선 39척이 침몰하는 등 격렬한 손실을 입기도 했다.

 

전투가 지속되면서 순천왜성의 왜군은 완전히 고립되어 갔다. 고니시는 무력으로 돌파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명나라 장수에게 뇌물을 보내며 철수로를 열어달라는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적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며 강력한 해상 봉쇄를 유지했다. 순천왜성을 둘러싼 싸움은 남해안에 남아 있던 왜군의 거점을 압박하고 퇴로를 전면 차단하는 거대한 봉쇄전이었다.

 

11월 13일 장도 전양(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앞바다) 해전은 탈출을 시도하던 왜군을 봉쇄선에서 격퇴한 전투였다. 이 봉쇄를 뚫고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일본 구원 함대와 벌인 남해의 마지막 대결전이 바로 뒤이어 벌어진 노량해전(11월 19일)이다.

 

인근 광양 망덕산 쪽에 올라서면 광양만과 남해로 이어지는 물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도망치는 왜군을 직접 추격했다면 최후의 결전은 광양만 일대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순천왜성 전투는 노량해전과 별개로 떨어진 싸움이 아니다. 왜군을 고립시키고 퇴로를 차단한 기선 제압이 노량해전으로 이어졌으며, 순천에서 시작된 봉쇄전이 정유재란의 마지막 종착지인 노량으로 확대된 것이다.

 

대한민국 해군이 군함의 이름을 정할 때 단순히 행정 지명을 따르기보다 그 땅에 서린 역사와 호국 전통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신성함'이라는 이름 역시 정유재란 끝자락을 장식했던 이 위대한 전투와 신성리의 호국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철길과 기차가 어린 시절 순천에 대한 그리운 기억을 일깨운다면, '순천함'과 '신성함'이라는 두 척의 군함에 새겨진 이름은 순천이 간직한 호국 역사의 깊은 흔적이다.

 

순천왜성으로 향하는 길목 직전에는 충무사가 자리하고 있다. 충무사는 전쟁이 끝난 지 약 100년 뒤(1697년)에 건립되었다. 왜성에서 죽은 왜구의 원귀가 마을을 괴롭히자, 충무사를 짓고 제를 올리니 비로소 마을이 편안해졌다는 민간 전승이 전해온다. 사당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충장공 정운 장군, 그리고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그 사실을 숨기고 전투를 독려했던 송희립 장군 등 나라를 구한 명장들과 무명 수군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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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서행장 공적비 [사진=이병록]

 

이곳 충무사 한쪽에는 일제가 세웠던 '소서행장 공적비' 잔해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왜성 천수대에 세워졌다가 광복 후 파괴되어 버려졌던 것을 역사의 반면교사로 삼고자 거두어 관리하고 있다.

 

순천왜성과 울산왜성은 전국에 남아있는 왜성 유적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보존 상태와 구조적 완성도가 뛰어난 곳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답사에서 순천의 현장을 직접 확인했으니, 다음 울산 답사의 첫 번째 목표지는 단연 울산왜성이 될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 쌓은 왜성 양식의 석성은 정작 일본 본토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우리나라 남해안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의 성곽 학자들이 성의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을 찾곤 한다. 자랑스러운 유산은 아니지만, 가슴 아픈 통사의 현장이다. 소서행장 비석이든 왜성 석축이든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기에 순천의 현장처럼 모질게 보존하고 되새겨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ㅣ 이병록

정치학박사,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제독(준장), 저서(이병록의 신대동여지도, 한국안보의 시간, 관군에서 의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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