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500년 전 시베리아 수렵채집 사회를 휩쓴 치명적인 흑사병 집단 발병의 흔적이 고대 DNA 분석을 통해 확인됐다. 이번 연구는 흑사병이 농경사회와 도시의 등장 이후에야 대규모 유행을 일으켰다는 기존 통설을 뒤집으며, 인구 규모가 작고 이동성이 큰 선사시대 수렵채집 공동체에서도 공동체 전체를 붕괴시킬 정도의 치명적인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흑사병 감염 증거가 확인되면서 흑사병의 기원과 초기 확산 과정을 둘러싼 학계의 이해에도 중대한 전환점을 제시했다.
이번 연구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루아이리드 맥클라우드(Ruairidh Macleod) 연구원을 비롯해 코펜하겐대학교의 마틴 시코라(Martin Sikora), 에스케 빌러스레브(Eske Willerslev) 교수 등 국제 공동연구진이 수행했다. 연구 결과는 「Lethal plague outbreaks in Lake Baikal hunter-gatherers 5,500 years ago(5,500년 전 바이칼 호수 수렵채집인 사회의 치명적인 흑사병 발병)」라는 제목으로 2026년 세계적 학술지 『Nature』에 게재됐다.
연구진은 러시아 시베리아 남동부 바이칼호 인근의 네 곳의 선사시대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인골 46구를 대상으로 고대 DNA 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전체의 39%에 해당하는 18명에게서 흑사병균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의 유전자가 검출됐다.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과 유전체 분석을 종합한 결과, 이들은 약 5,500년 전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집단 발병의 희생자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연구진이 확인한 흑사병 균주는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계통보다 오래된 새로운 계통이었다. 유전체 분석 결과 이 균주는 약 5,700년 전에 분화한 것으로 추정됐으며, 이후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 계통과는 다른 독특한 진화 경로를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흑사병의 기원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에서 가장 주목받은 부분은 감염자의 연령과 가족관계였다. 무덤에서는 형제자매와 부모·자녀가 함께 매장된 사례가 발견됐으며, 사촌 관계의 어린 소녀 세 명이 동시에 묻힌 사례도 확인됐다. 연구진은 가족 구성원들이 병든 친족을 돌보는 과정에서 감염이 확산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는 선사시대에도 사람 간 전염 사슬이 존재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로 평가된다.
또한 연구진은 감염된 흑사병 균주에서 면역체계를 과도하게 자극하는 '슈퍼항원(superantigen)' 독소 유전자를 발견했다. 이 독소는 극단적인 면역 반응을 유발해 질병의 치명성을 높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7세에서 11세 사이 어린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실제로 공동묘지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 희생자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비율로 확인돼 당시 지역사회가 겪었을 충격의 규모를 짐작하게 했다.
연구진은 흑사병의 최초 전파 경로로 마못(marmot)과 같은 대형 설치류를 지목했다. 마못은 오늘날에도 흑사병균의 주요 자연 숙주로 알려져 있으며, 바이칼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인간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당시 수렵채집인들이 고기와 모피를 얻기 위해 마못을 사냥하고 가죽을 벗기는 과정에서 병원균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공동묘지에서는 마못의 이빨로 만든 장신구도 발견됐다.
이번 연구는 흑사병이 농업의 발달과 도시화 이후에야 대유행을 일으켰다는 기존 가설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인구가 적고 이동성이 큰 수렵채집 공동체에서도 치명적인 전염병이 반복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으며, 동물과 인간의 긴밀한 접촉이 병원체 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만 흑사병이 어떻게 수백 년 만에 북유라시아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됐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야생동물을 통한 광범위한 전파였는지, 사람 간 감염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이번 발견은 흑사병의 기원을 수천 년 더 앞당기며,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병원체와 공존하고 싸워왔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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