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광 폐쇄 이후 인구 감소와 빈집 늘어난 고한18리, 철거 대신 오래된 공간을 다시 쓰는 방식 선택
- 빈집은 객실, 골목은 로비, 동네 식당과 상점은 호텔 편의시설로,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
- 주민과 지역활동가가 함께 만든 변화, 지역이 스스로 회복하는 ‘리질리언스’의 현장
![[크기변환]KakaoTalk_20260921_085351559_03.jpg](/data/editor/2609/20260921090240_ikfvllpx.jpg)
한때 광부들이 오가며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던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고한읍. 석탄산업이 쇠퇴하고 탄광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서 사람들도 떠났다. 북적이던 골목에는 빈집이 늘었고, 장사를 접은 상점들도 생겨났다. 시간이 멈춘 듯했던 이 탄광마을에 다시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오래된 빈집은 여행객이 머무는 객실이 됐고 골목길은 호텔의 로비가 됐다. 중국집과 고깃집 같은 동네 식당은 여행객의 식사를 책임지고, 사진관과 이발소, 카페와 공방은 호텔의 편의시설처럼 연결됐다. 새로운 호텔 건물을 지은 것이 아니다. 원래 있던 마을을 하나의 호텔로 만든 것이다.
정선 고한읍 고한18리의 ‘마을호텔18번가’ 이야기이다.
이곳의 변화는 지역소멸 시대에 주목받는 ‘리질리언스(resilience·회복탄력성)’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지역의 리질리언스는 위기를 겪은 공동체가 단순히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새로운 생존 방식을 만들어가는 힘을 의미한다.
고한18리는 탄광산업의 쇠퇴라는 큰 변화를 겪은 뒤 새로운 대규모 시설을 들여오는 대신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과 공간, 골목과 상점을 다시 연결하는 길을 선택했다.
![[크기변환]KakaoTalk_20260921_085351559_09.jpg](/data/editor/2609/20260921090306_lrbzhvhd.jpg)
광부들이 떠나자 함께 쇠퇴한 마을
고한의 역사는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성장과 쇠퇴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산간지역이었던 고한은 탄광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85년 읍으로 승격될 당시 인구는 3만2천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1989년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전후해 탄광들이 잇따라 문을 닫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2001년 10월 삼척탄좌 정암광업소가 폐광하면서 고한의 탄광시대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일자리를 따라 들어왔던 사람들이 다시 떠나면서 인구는 빠르게 줄었다. 2016년 말 고한읍 인구는 4천715명까지 감소했다.
고한시장과 이어지는 고한18리도 마찬가지였다. 탄광이 활기를 띠던 시절에는 광부들의 월급날이면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이 오갔지만, 석탄산업이 쇠퇴하면서 골목 양쪽에 있던 30여 개 상가 대부분이 빈 공간으로 남게 됐다.
지역을 살리기 위한 여러 개발사업이 이어졌지만 그것이 주민들의 일상과 골목의 변화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주민들이 선택한 출발점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골목’이었다.
한 사람이 빈 상가에 불을 켜면서 시작된 변화
마을의 변화는 대규모 도시재생 사업보다 먼저 시작됐다.
2017년 지역에서 활동하던 편집디자이너 김진용 씨가 고한18리의 빈 상가를 매입해 직접 고치고 ‘하늘기획’이라는 사무실을 열었다.
사람이 떠난 골목에 다시 불이 켜졌다. 이를 계기로 유영자 당시 고한18리 이장이 김 씨와 함께 마을을 바꿔보자고 나섰고, 이듬해인 2018년 1월 ‘18번가 마을만들기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마을 반장과 주민뿐 아니라 화가와 디자이너 등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주민들은 골목을 청소하고 집 앞에 꽃을 내놓았다. 오래된 빈집과 상점도 하나씩 손보기 시작했다.
고한18리라는 이름에도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
주민들은 영화 ‘1번가의 기적’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18번’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좋아하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아 골목을 ‘고한18번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래된 건물을 고치는 것과 함께 주민들이 자신이 사는 동네를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호텔을 새로 짓는 대신 마을 전체가 호텔이 됐다. 골목이 달라지면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사람들이 이곳을 다시 찾아오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마을호텔’이었다.
일반적인 호텔은 한 건물 안에 객실과 로비, 식당, 카페, 회의실 같은 시설을 모아놓는다. 고한18번가는 반대로 생각했다. 마을 곳곳에 이미 존재하는 시설을 호텔의 기능으로 연결했다.
빈집을 고쳐 객실로 만들고 동네 식당은 여행객들이 이용하는 식당으로 연결했다. 카페와 사진관, 이발소 등은 호텔의 편의시설 역할을 하고 마을회관도 회의공간으로 활용했다. 하나의 건물 안에 있던 호텔의 기능을 골목 전체로 펼쳐놓은 ‘수평형 호텔’인 셈이다.
마을호텔의 첫 번째 공간은 탄광촌의 시간을 간직한 ‘초원식당’이었다. 1970년대 문을 연 초원식당은 탄광이 활기를 띠던 시절 일을 마친 광부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회식을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마을이 쇠퇴하면서 2017년 결국 영업을 중단했다.
건물주였던 유영자 당시 이장은 이 공간을 마을공동체가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이후 국토교통부 소규모재생 공모사업과 연결되면서 숙박시설로 다시 태어났다.
2020년에는 마을호텔18번가협동조합이 설립됐고 같은 해 5월 마을호텔 1호점이 문을 열었다. 2022년 6월에는 2호점까지 운영을 확대했다.
광부들이 모이던 식당이 여행객이 잠을 자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과거의 흔적을 없애고 전혀 새로운 건물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오래된 공간에 새로운 역할을 더하는 것이었다.
숙박객보다 ‘배우러 오는 사람’이 더 많은 마을
마을호텔이 알려지면서 고한18번가를 찾는 사람도 늘었다.
2026년 7월 기준 마을호텔18번가의 연평균 숙박객은 약 1천500명이다. 이와 별도로 연간 약 1천800명이 도시재생과 마을공동체 운영 사례를 배우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 마을호텔 개장 이후 누적 방문객은 약 7만 명으로 집계됐다.
여행을 위해 머무는 사람보다 마을이 변화한 과정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더 많은 셈이다. 마을호텔18번가협동조합의 역할도 숙박업에 머물지 않는다.
공방 체험과 지역 관광지를 연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주민들이 참여하는 여행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동네 상점과 먹거리, 지역 특산품을 관광과 연결하고, 발생한 수익 일부는 지역 어르신 여행이나 학생 체험, 주민 강사 양성 등 공동체 활동에 다시 사용한다.
이 같은 활동을 인정받아 마을호텔18번가협동조합은 2025년 ‘협동조합의 날’ 기념행사에서 기획재정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이 마을을 ‘리질리언스’로 바라보는 이유
마을호텔18번가를 단순히 성공한 관광사업으로만 바라보면 이곳에서 일어난 변화의 상당 부분을 놓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설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느냐가 아니다. 탄광이 사라진 뒤 남겨진 것들을 어떻게 다시 사용했느냐에 있다.
고한은 지역경제를 지탱하던 탄광산업이 사라지는 큰 충격을 겪었다. 일자리가 줄고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빈집과 빈 상가가 늘었고 공동체도 약해졌다. 고한18번가는 이러한 흔적을 모두 없애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광부들이 이용했던 식당은 숙박시설이 됐고, 빈집은 객실이 됐다. 동네 상점은 여행객들이 이용하는 편의시설로 연결됐으며 탄광촌의 오래된 골목과 기억도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지역의 이야기가 됐다.
기존 건축물을 다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자원의 재활용과 맞닿아 있고, 주민들이 공동으로 마을을 운영한다는 점에서는 공동체 회복의 의미가 있다. 관광객의 소비가 기존 식당과 상점으로 이어지도록 했다는 점에서는 지역경제의 순환 구조를 만드는 시도이기도 하다.
지역의 리질리언스가 단순히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하지 않는 이유이다. 과거의 탄광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탄광이 남긴 공간과 기억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자원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마을을 바꾼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신뢰였다. 이 과정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김진용 마을호텔18번가협동조합 이사장은 다른 지역에서 이곳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시설이나 사업모델보다 ‘신뢰 자본’을 강조한다.
마을 만들기 초기에는 주민 간 의견 차이와 갈등도 있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주민들이 하나의 방향을 만들어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김 이사장은 2026년 언론 인터뷰에서 초기 약 3년 동안 갈등을 겪었지만 그 과정을 지나면서 주민들이 함께 배우고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마을재생에서 중요한 것은 예산과 시설만이 아니며, 주민들이 서로를 믿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점은 마을호텔18번가를 다른 지역에 그대로 옮겨놓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빈집을 객실로 고치는 것은 따라 할 수 있다. 동네 식당과 카페를 하나의 관광 프로그램으로 묶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주민들이 함께 골목을 청소하고, 자신의 공간을 내놓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쌓아온 신뢰까지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다.
탄광이 사라진 뒤에도 마을은 계속된다
고한18번가의 변화는 결국 작은 골목에서 시작됐다. 한 사람이 빈 상가를 고쳐 불을 켰고 주민들은 골목을 청소하고 꽃을 심었다. 지역의 젊은 활동가와 예술인들이 참여했고, 비어 있던 공간에는 하나씩 새로운 역할이 생겼다. 그 작은 변화들이 연결되면서 마을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때 탄광이라는 하나의 산업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지역은 이제 빈집과 골목, 사람과 상점, 그리고 탄광촌이 간직한 기억을 연결해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김진용 이사장은 마을호텔을 시작한 목적이 숙박사업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쇠퇴하는 마을을 다시 살려가는 과정에서 ‘호텔’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졌고, 그에게는 수익보다 마을이 살아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마을호텔18번가에서 눈여겨볼 것은 새롭게 만들어진 객실의 숫자만이 아니다. 사라져가는 마을에서 무엇을 버리지 않고 남겼는지, 그리고 남겨진 것들을 어떻게 다시 연결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탄광은 떠났지만 골목은 남았다. 오래된 집과 가게도 남았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계속 살아온 사람들이 남았다. 고한18번가는 그 남아 있는 것들에서 다시 시작했다.
지역의 회복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 탄광이 번성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이 가진 것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는 일이다.
정선의 오래된 탄광촌에서 시작된 ‘마을호텔 18번가’는 지역의 리질리언스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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