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자연과 함께 살아오며 축적해 온 원주민들의 전통지식이 현대 보건의료의 새로운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8월 10일 공식 X를 통해 세계 원주민의 날을 계기로 원주민 공동체가 지켜온 전통지식의 가치를 되새기고, 이러한 지식이 건강과 웰빙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WHO는 원주민 전통지식을 단순히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문화유산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건강을 바라보는 하나의 중요한 지식 체계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전통의학과 건강에 관한 지식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자연환경과 공동체의 삶 속에 축적돼 왔다. 어떤 식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계절과 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질병을 예방하고 몸과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 등 다양한 경험이 오랜 시간 동안 공동체 안에서 전승돼 왔다.
WHO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현대 의료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의료서비스를 충분히 이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특히 원주민 공동체 가운데에는 의료 접근성이 낮거나 경제적·사회적 불평등과 차별로 인해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의 환경과 문화에 익숙한 전통지식은 공동체의 건강을 지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WHO는 이번 메시지를 통해 원주민의 전통지식을 존중하면서도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보건의료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통지식과 현대의학을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바라보기보다 안전성과 효과가 확인된 영역에서 서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다.
실제로 현대 의학의 발전 과정에서도 자연과 전통지식에서 출발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말라리아 치료제인 아르테미시닌이다. 중국의 과학자 투유유 연구팀은 전통 의학 자료에서 단서를 얻어 개똥쑥에서 유효성분을 찾아냈고, 이는 현대적인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로 이어졌다. 투유유는 이 연구로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이처럼 전통지식은 과학적 연구와 만났을 때 새로운 의학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전통 치료법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전통의학을 현대 의료체계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안전성과 효과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WHO 역시 전통의학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와 적절한 규제를 바탕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동시에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전통지식의 주체인 원주민 공동체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다.
오랫동안 공동체가 지켜온 약용식물이나 치료법 등이 외부 연구기관이나 기업에 의해 활용될 경우, 지식의 출처가 제대로 인정되지 않거나 경제적 이익이 공동체에 돌아가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전통지식을 현대 과학과 연결하는 과정에서는 지식의 소유자인 원주민 공동체가 연구와 활용 과정에 참여하고, 그들의 문화와 권리가 존중돼야 한다는 원칙이 중요하다.
WHO는 이번 메시지에서 이러한 관점과 함께 형평성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차별에 맞서며, 원주민의 권리를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전통의학에 관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건강은 병원이나 의약품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과 사회적 조건, 문화, 경제적 여건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원주민 공동체의 건강 문제 역시 의료서비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빈곤과 차별, 교육과 주거, 환경과 토지, 문화적 권리 등이 함께 얽혀 있다.
특히 원주민들에게 자연은 단순한 자원의 의미를 넘어 삶과 문화가 이어지는 터전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연환경을 지키는 일과 공동체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 서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도 중요해지고 있다.
WHO가 말하는 ‘모두를 위한 건강(Health for All)’ 역시 이러한 포괄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한다.
누구나 자신의 문화와 정체성을 존중받으면서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지식이 건강을 위한 자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WHO의 메시지는 전통과 현대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랜 시간 공동체가 축적해 온 지식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현대 과학의 엄격한 검증과 연결하면서 더 안전하고 포용적인 보건의료의 길을 찾아보자는 의미에 가깝다.
빠르게 변화하는 의료기술의 시대에도 사람과 자연, 문화와 공동체의 관계는 여전히 건강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한 세대가 지켜온 지식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그 지식이 과학과 만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전통은 과거에 머무는 유산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자산이 될 수 있다.
WHO의 이번 메시지는 바로 그 가능성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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