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부 웨스트서식스주 치체스터 북쪽, 사우스다운스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오래된 고딕 동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숲이 나타난다. 바로 킹글리 베일(Kingley Vale)이다. 이곳에서는 수백 년의 시간을 견뎌온 주목나무들이 뒤틀린 줄기와 굽어 내려온 가지를 서로 얽은 채 계곡의 비탈을 덮고 있다. 햇빛이 빽빽한 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숲길은 일반적인 영국의 삼림 풍경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킹글리 베일은 전체 지정구역이 약 204헥타르에 이르는 생태·고고학적 명소이며, 그 가운데 약 147.9헥타르가 국립자연보호구역(National Nature Reserve)으로 관리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이곳을 서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주목 숲 가운데 하나로 평가한다. 특히 고대 주목 군락과 석회질 초원이 함께 형성하는 독특한 생태계 때문에 과학적으로도 중요한 장소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나무들
킹글리 베일을 대표하는 것은 단연 주목나무다. 학명은 Taxus baccata로, 영국에서 오랜 생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고목이다.
이곳에는 최소 수백 년을 살아온 고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일부 개체는 500~2,000년 정도의 나이로 추정된다. 영국 정부 자료는 이곳의 고대 주목 가운데 일부가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가장 큰 나무들은 둘레가 5m를 넘는다.
다만 '2,000년 된 나무'라는 표현은 조금 신중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주목은 속이 비어 있는 경우가 많고 생장 속도도 개체마다 크게 달라 정확한 나이를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2003년 Journal of Ecology에 실린 연구에서도 킹글리 베일 주목의 나이를 둘러싸고 과거부터 여러 추정치가 존재했으며, 고대 주목의 나이를 단순히 나이테 수로 계산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연구에서도 오래된 주목의 정확한 연대 측정이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특히 속이 빈 고목은 살아 있는 목질부만 조사하면 실제 나이를 과소평가하거나, 반대로 성장률을 단순하게 가정하면 지나치게 오래된 나이가 산출될 수 있다. 따라서 킹글리 베일의 고목을 소개할 때는 '2,0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나무가 있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
왜 나무들은 이렇게 뒤틀렸을까
킹글리 베일의 주목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오래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을 걷다 보면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굵은 가지가 땅을 향해 길게 내려왔다가 다시 하늘을 향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주목은 줄기가 부러진 뒤에도 새로운 가지가 자라거나, 가지가 땅에 닿은 뒤 뿌리를 내리면서 새로운 생장을 이어가는 독특한 특성을 보인다. 오랜 세월 동안 폭풍과 방목, 다른 식생과의 경쟁을 견디면서 이런 형태가 반복적으로 만들어졌다.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는 고대 주목이 수백 년 동안 속이 비어가면서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나무라고 설명한다. 나무가 썩어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곧 죽는 것은 아니며, 주목과 같은 장수종은 수백 년 동안 '느리게 쇠락하면서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그래서 킹글리 베일의 숲에서는 하나의 나무와 하나의 숲을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장면이 나타난다. 거대한 줄기에서 내려온 가지가 땅에 닿고 다시 뿌리를 내리면서 새로운 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오래된 주목이 만들어내는 이 독특한 형태는 숲 전체를 하나의 살아 있는 건축물처럼 보이게 한다.
바이킹 전설과 중세 장궁 이야기
킹글리 베일의 주목에는 여러 전설도 따라붙는다.
그중 하나는 서기 9세기 바이킹과 앵글로색슨족의 전투와 관련된 이야기다.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의 주목은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들을 기리기 위해 심어졌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중세 시대 장궁 제작을 위해 주목을 심었다는 것이다. Natural England 역시 이 같은 전설을 소개하고 있지만, 확정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다룬다.
주목과 장궁의 관계 자체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 주목 목재는 활을 만드는 데 적합한 물성을 지녔고 중세 유럽에서 실제로 사용됐다. 그러나 킹글리 베일의 주목 숲이 15세기에 장궁 제작 때문에 거의 전멸했다는 식의 설명은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 어렵다.
영국의 주목과 장궁을 둘러싼 이야기는 오랫동안 전해졌지만, 역사·생태 연구에서는 당시 장궁에 사용된 목재 상당량이 유럽 대륙에서 수입됐다는 점도 지적된다. The Guardian 역시 킹글리 베일을 소개하면서 영국 주목이 장궁 때문에 대규모로 사라졌다는 통념에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이곳의 매력은 '장궁 때문에 살아남은 마지막 숲'이라는 극적인 이야기보다, 수백 년에서 최대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주목 군락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나무만 보는 여행이 아니다
킹글리 베일은 거대한 주목 숲만을 보기 위해 찾는 곳도 아니다. 숲을 빠져나오면 사우스다운스 특유의 석회질 초원이 펼쳐지고, 계절에 따라 야생화와 나비, 새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국 정부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영국에서 번식하는 나비 58종 가운데 39종이 기록됐으며, 초원에는 여러 종류의 난초와 다양한 야생식물이 자란다. 초록딱따구리, 나이팅게일, 블랙캡, 황조롱이, 붉은솔개, 말똥가리 같은 새들도 관찰할 수 있다.
특히 주목 숲과 석회질 초원이 맞닿는 지점은 킹글리 베일의 생태적 가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사우스다운스 국립공원 당국은 이곳을 고대 주목 숲과 초원, 관목지가 어우러진 모자이크형 생태계로 설명한다. 가축의 방목 역시 초원의 식생을 관리하고 생물다양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26년에는 이곳에서 영국에서는 처음 확인된 희귀 균류인 블루베이스드 어스텅(blue-based earthtongue)이 발견되면서 다시 한번 생태학적 가치가 주목받기도 했다. Natural England는 이번 발견을 킹글리 베일의 높은 서식지 보전 상태를 보여주는 사례로 소개했다.
숲길 끝에서 만나는 수천 년의 역사
킹글리 베일의 또 다른 매력은 자연과 고고학이 한 장소에 겹쳐 있다는 점이다.
이 지역에는 청동기시대의 고분인 데빌스 험프스(Devil's Humps)를 비롯해 여러 고대 유적이 남아 있다. 전체 지역에는 14개의 지정 고대기념물이 있으며, 선사시대 정착지와 방어시설의 흔적도 확인된다.
따라서 이곳의 산책은 단순한 숲길 걷기와 다르다. 한쪽에서는 수백 년 된 주목이 가지를 뻗고 있고, 언덕 위에서는 수천 년 전 사람들이 남긴 무덤과 흔적을 만난다. 현대의 여행자가 걷는 같은 길을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지나갔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풍경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여행자를 위한 킹글리 베일
킹글리 베일은 영국 남부 여행에서 하루를 조용히 보내기에 좋은 장소다. 가장 가까운 주요 도시인 치체스터(Chichester)에서 약 5㎞ 떨어져 있으며, 영국 정부는 치체스터역을 가장 가까운 기차역으로 안내한다. 현장에는 웨스트 스토크(West Stoke)와 스토턴(Stoughton) 방향의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웨스트 스토크 주차장은 규모가 제한적이어서 주말이나 학교 방학 기간에는 혼잡할 수 있다.
방문할 때는 무엇보다 숲의 분위기를 서두르지 않고 즐기는 것이 좋다. 오래된 주목 주변에서는 나무를 오르거나 가지를 잡아당기는 행동을 피하고, 야생식물이나 버섯을 채취해서도 안 된다. 현재 보호구역에서는 개를 반드시 목줄에 묶어야 하며, 캠핑과 불 피우기, 허가 없는 드론 비행 등도 제한된다. 또한 가축 방목이 이뤄지는 곳이므로 안내 표지와 현장 관리 지침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는 바람이 강한 날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일부 나무는 노화와 고사로 인해 가지가 떨어질 위험이 있어 영국 정부도 강풍 때 나무 아래에 서지 말 것을 안내하고 있다.
킹글리 베일을 걷다 보면 시간의 개념이 조금 달라진다. 수백 년을 살아온 주목은 한 인간의 생애를 훨씬 넘어선 시간을 품고 있고, 일부 고목은 1,000년을 훌쩍 넘겼을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그 나무들이 정확히 몇 살인지를 완벽하게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숫자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굽어지고 갈라지고 속이 비어버린 줄기에서도 다시 가지를 뻗는 주목의 모습은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준다. 영국 남부의 한 작은 계곡에 남은 이 숲은 자연이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이 얼마나 느리고 장엄한지를 보여주는 여행지다.
고딕 동화 속 숲을 걷는 듯한 풍경, 청동기시대의 흔적, 희귀한 야생동물과 꽃, 그리고 수백 년에서 최대 수천 년의 시간을 품은 고대 주목. 킹글리 베일은 단순히 '기이한 나무가 있는 곳'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시간이 겹쳐진 사우스다운스의 살아 있는 역사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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