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메르가 그린 실제 초상 아닌 ‘트로니(tronie’, 모델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아
- 몇 번의 붓질로 표현한 진주부터 2길더의 경매 기록까지, 과학 조사로 작품의 비밀 하나씩 밝혀져
어두운 배경 속 한 소녀가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고, 귀에는 빛을 머금은 커다란 진주가 걸려 있다.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가 1665년경 그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다.
그림이 완성된 지 약 360년이 흘렀지만 소녀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미술 콘텐츠를 소개하는 X 계정 ‘Art Guide’는 6일 오후 9시 38분께 이 작품을 소개하며 그림 속 소녀의 정체와 진주 귀걸이, 작품이 세상에 다시 알려지기까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한 소녀를 모델로 그린 초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 인물의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은 아니다.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네덜란드 마우리츠하위스(Mauritshuis)는 이 작품을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인물화의 한 유형인 ‘트로니(tronie)’로 분류한다.
트로니는 특정 인물의 모습을 기록하는 일반적인 초상화와 달리 표정이나 얼굴, 독특한 의상 등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 그림이다. 따라서 그림을 위해 실제 모델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작품 속 소녀가 누구였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봐도 신원을 추정할 만한 특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베르메르는 점이나 주근깨처럼 특정 인물을 구별할 수 있는 세부적인 특징을 거의 표현하지 않았다. 과학 조사에서는 맨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속눈썹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모델의 정체를 밝힐 새로운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작품의 상징처럼 자리 잡은 ‘진주 귀걸이’에도 흥미로운 사실이 숨어 있다.
소녀의 귀 아래에서 빛나는 진주는 얼핏 정교하게 그려진 보석처럼 보이지만 실제 화면에서는 몇 번의 붓질로 표현돼 있다. 밝은 빛을 받는 부분과 옷깃의 빛이 반사되는 부분을 이용해 둥근 진주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귀와 귀걸이를 연결하는 고리 역시 그려져 있지 않다.
마우리츠하위스는 귀걸이가 실제 진주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크기가 자연산 진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당시 사용되던 유리나 은, 주석 등으로 만든 모조 진주를 표현했거나 베르메르가 회화적으로 만들어낸 장식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작품이 완성된 이후 어디에 있었는지도 상당 기간 분명하지 않다. 17세기 작품의 소장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은 있지만 확정적인 기록은 부족하고, 이후 오랜 기간 작품의 행방을 뚜렷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다시 확실한 기록이 등장한 것은 1881년이다.
그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경매에서 미술품 수집가 아르놀뒤스 안드리스 데스 톰베(Arnoldus Andries des Tombe)가 이 작품을 단 2길더에 낙찰받았다. 수수료 30센트를 더해 실제 지불한 금액은 2.30길더였다. 당시 그림은 오염된 상태였고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기 전이었다.
데스 톰베는 작품을 소장하다 1902년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미술품 12점을 마우리츠하위스에 유증했다. 이에 따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도 1903년 미술관 소장품이 됐고, 이후 베르메르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소녀의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히려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미국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Tracy Chevalier)는 1999년 발표한 동명의 소설에서 소녀에게 ‘그리트(Griet)’라는 이름을 붙이고 베르메르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라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 소설은 2003년 영화로도 제작됐으며 스칼릿 조핸슨(Scarlett Johansson)이 그리트 역을 맡았다.
하지만 ‘그리트’라는 이름도, 베르메르의 하녀였다는 설정도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그림 속 인물을 둘러싼 빈자리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채운 이야기다.
작품 속 인물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림 자체에 관한 비밀은 과학기술을 통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마우리츠하위스가 2018년 진행한 과학 조사에서는 현재 검게 보이는 배경에 원래 녹색 커튼이 표현돼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안료가 변색돼 세부 표현이 사라진 것이다. 베르메르가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소녀의 귀와 머리 스카프, 목 뒤쪽 위치 등을 수정한 흔적도 발견됐다.
그럼에도 가장 궁금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베르메르가 누구를 바라보며 이 얼굴을 그렸는지, 실제 모델이 있었다면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오랜 시간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온 데에는 이러한 여백도 한몫한다. 고개를 돌린 순간과 살짝 벌어진 입술은 마치 소녀가 방금 전까지 무엇인가 하고 있었거나, 이제 막 말을 건네려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하지만 그 순간의 앞뒤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360년 동안 작품을 분석하는 기술은 크게 발전했다. 검게 변한 배경 아래 무엇이 있었는지, 베르메르가 어느 부분을 고쳐 그렸는지까지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림 속 소녀의 이름만큼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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