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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밤길에 내려앉은 달빛…그림쇼가 그려낸 150년 전의 고요

  • 이경희 기자
  • 입력 2026.10.01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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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앳킨슨 그림쇼의 1874년작 ‘A Moonlit Lane’ 물감으로 표현한 달빛과 젖은 거리
  • 철도회사 서기에서 독학 화가로 밤과 빛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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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앳킨슨 그림쇼(John Atkinson Grimshaw)의 1874년 작품 ‘A Moonlit Lane’. 비에 젖은 길과 돌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번지는 달빛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사진=James Lucas 공식 X]

 

비가 지나간 밤길은 아직 촉촉하게 젖어 있다. 앙상하게 얽힌 나뭇가지 너머로 둥근 달이 떠오르고, 그 빛은 길과 돌담, 어두운 생울타리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길 위에 남은 물기에도 희미한 은빛이 번진다.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서늘한 밤공기와 비가 그친 뒤의 적막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하지만 이 모든 빛은 실제 달빛이 아니다. 150여 년 전 한 화가가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만들어낸 밤의 풍경이다.

 

예술과 역사 등을 소개하는 제임스 루카스(James Lucas)는 10월 1일 자신의 X 계정에 영국 빅토리아 시대 화가 존 앳킨슨 그림쇼(John Atkinson Grimshaw·1836~1893)의 1874년 작품 ‘A Moonlit Lane’을 소개했다.

 

루카스는 “저 달빛은 진짜가 아니다. 그 모든 빛은 유화 물감”이라는 말로 그림을 소개했다. 사진처럼 정교하면서도 현실의 밤보다 더 고요하게 느껴지는 그림쇼의 달빛에 주목한 것이다.

 

‘A Moonlit Lane’은 그림쇼가 달빛과 밤의 풍경을 자신만의 화풍으로 발전시키던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크리스티 기록에 따르면 작품에는 ‘Atkinson Grimshaw 1874’라는 서명이 남아 있다.

 

그림에는 특별한 사건도, 시선을 끄는 인물도 없다. 텅 빈 길과 나무, 담장 그리고 달이 전부에 가깝다. 그럼에도 시선이 오래 머무는 것은 빛 때문이다. 구름 사이에서 내려온 달빛이 젖은 길에 비치고, 나뭇가지와 담장 사이의 어둠과 만나면서 늦가을 밤 특유의 차갑고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림쇼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정교한 그림들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1836년 영국 리즈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부터 화가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레이트 노던 철도회사(Great Northern Railway)에서 서기로 일하다 스물네 살 무렵 직장을 떠나 그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가족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전문적인 미술교육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그림을 익히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새롭게 등장하던 사진 기술에도 관심을 보였다.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은 그림쇼가 사진에 매료됐으며 작품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정밀한 구도와 세밀한 묘사는 당시 사진 기술과 회화가 만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림쇼의 밤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정교함만은 아니었다.

 

그는 1870년대부터 달빛과 안개, 비에 젖은 거리와 항구, 가스등이 켜진 도시를 즐겨 그렸다. 어둠 속에 빛이 어떻게 번지고 사라지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하면서 평범한 도시의 밤을 서정적인 풍경으로 바꿔놓았다.

 

그의 달빛 그림은 당시 또 다른 야경화의 거장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의 시선도 붙잡았다. 휘슬러는 그림쇼의 달빛 작품을 접한 뒤 자신이 ‘녹턴(Nocturne)’의 창시자라고 생각했지만 그림쇼의 작품을 보고 생각을 달리했다는 취지의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이 표현한 밤은 서로 달랐다. 휘슬러가 색채와 분위기를 통해 밤의 인상을 풀어냈다면, 그림쇼는 젖은 길 위의 반사광과 나뭇가지의 윤곽까지 세밀하게 담아내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있는 듯한 밤을 만들어냈다.

 

‘A Moonlit Lane’이 그려진 지 어느덧 150여 년이 흘렀다. 그림 속 거리의 모습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캔버스에 머문 달빛만은 여전히 선명하다.

 

실제 달빛은 한 줄기도 들어 있지 않은 그림이다. 그런데도 바라보고 있으면 비가 막 그친 밤길을 걷는 듯하고, 차가운 공기와 깊어진 밤의 정적까지 느껴진다. 그림쇼가 그린 것은 어쩌면 달빛 자체가 아니라, 달빛이 내려앉은 밤의 분위기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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