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산 석유·가스 주요 수입국 대상 추가 관세 유예, 트럼프 “미국 국익에 부합”
- 젤렌스키 “러시아 압박할 중요한 수단 무력화” 반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을 겨냥한 추가 제재를 시행 직전에 면제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입장 차이가 뚜렷해지고 있다. 미국은 에너지 가격과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해 러시아에 대한 추가 압박을 유예한 반면, 유럽연합(EU)은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을 제한하기 위한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CNN과 로이터통신, AP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러시아 관련 제재와 추가 관세의 적용을 면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지난 9월 18일 자신이 서명한 '2026년 린지 그레이엄 러시아·이란 제재법'의 주요 조항이 시행되기 직전에 나온 결정이다.
해당 법률은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를 구매하는 주요 국가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와 관련된 개인 및 기업에 추가 제재를 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러시아산 원유·가스의 5대 수입국이 10월 18일 이후 신규 구매를 할 경우 해당 국가에서 미국으로 수입되는 상품에 10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산 상품에는 500%의 추가 관세를 적용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법률에 명시된 면제 권한을 행사하면서 상당수 제재 조항의 적용이 유예됐다. 기존에 시행 중인 모든 대러 제재가 해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새 법률을 통해 러시아에 가하려던 추가적인 경제 압박은 당분간 보류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에서 이번 결정이 미국의 국가이익에 부합한다는 내용의 확인서를 의회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판단을 내렸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면제 조치는 미국 행정부가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까지 유지된다.
이번 결정의 배경에는 미국의 에너지 가격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는 유가와 연료비 상승에 따른 부담을 안고 있다. 이란과의 전쟁으로 국제 에너지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러시아산 에너지 공급까지 제한할 경우 가격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돼 왔다.
앞서 미국은 러시아산 경유의 국제시장 수출을 허용하는 조치도 발표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미국 정치권 일각에서는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이 전쟁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재정 수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에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은 중요한 국가 재정 수입원이다. 국제사회가 에너지 거래를 제재 수단으로 활용해 온 것도 이러한 수입을 줄여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을 제한하기 위해서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이번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가 자국의 에너지 시설을 대규모로 공격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러시아에 압박을 가할 중요한 수단을 사실상 무력화했다고 비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의 전쟁을 끝내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법률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게 됐다며, 제재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최근 우크라이나의 발전소와 전력망 등 에너지 기반시설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당국에 따르면 대규모 공습으로 여러 지역에서 전력 공급이 중단됐으며, 민간 주거시설과 주요 기반시설에도 피해가 발생했다.
AP통신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 15곳 이상의 시설을 공격했으며, 우크라이나 방공망이 밤사이 발사된 드론 332대 가운데 289대를 격추했다고 보도했다.
전력시설에 대한 공격은 단순히 에너지 공급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전기가 끊기면 난방과 식수 공급, 의료시설 운영 등 시민들의 일상 전반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겨울철을 앞두고 전력망 피해가 반복될 경우 주민들의 생활과 안전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커질 수 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관계도 이전보다 불안정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석유시설 공격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며,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해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보다 협상하기 어려운 상대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군사 지원과 정보 공유를 둘러싼 갈등도 이어지고 있다. CNN은 우크라이나가 미국산 패트리엇 방공체계의 요격미사일을 소진한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측은 스타링크 위성통신 서비스의 군사용 기능이 제한되면서 일부 군사작전과 통신에도 차질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다만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정보 공유를 중단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있어 양측의 설명에는 차이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재 면제 결정은 미국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이번 조치를 지도력의 실패라고 비판했고, 공화당 돈 베이컨 하원의원도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완화하는 것이 전쟁을 끝내기보다 오히려 장기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제재법 입법에 참여한 민주당 리처드 블루멘털 상원의원 역시 이번 결정이 미국의 국가안보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푸틴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러시아는 미국의 결정을 환영했다. 러시아 국부펀드 수장인 키릴 드미트리예프는 이번 조치를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이라고 평가하며 미국과 러시아의 경제협력이 양국 모두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럽연합은 미국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12일 러시아의 군사·산업 부문과 관련된 기업 826곳과 개인 743명 등 총 1,569개 개인·단체를 추가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EU가 지금까지 시행한 단일 제재 명단 확대 조치 가운데 최대 규모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지원하기 위한 제재 대상은 약 4,600개 개인·단체로 늘어났다. EU는 러시아의 군수산업 공급망을 제한하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과 물자의 흐름을 차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럽 정상들은 추가 제재도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가 전쟁을 중단하지 않는 한 경제적 압박을 이어가야 한다는 입장으로, 미국의 제재 유예 결정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번 사안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군사적 충돌을 넘어 국제 에너지 시장과 무역, 각국의 경제정책까지 깊이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은 에너지 가격 안정과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와 유럽은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압박이 약해질 경우 전쟁이 더 길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무엇보다 에너지가 전쟁의 양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에는 석유와 가스 수출이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재정적 기반이 되는 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발전소와 전력망이 공격 대상이 되면서 시민들의 일상과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미국의 제재 면제가 얼마나 지속될지, 유럽의 추가 제재가 어떤 효과를 낼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다만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입장 차이가 커지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에도 새로운 변수가 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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